제목 | 활명수 109주년…장수비결은 무엇인가등록일 | 2006-09-26

- 지금껏 78억병 팔려...일렬로 세우면 지구 23바퀴 반 -


본사의 부채표 활명수가 9월 25일 109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국 내 최초의 등록상품으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된 바 있는 부채표 활명수는 109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 최고(最古)의 브랜드이자 소화제의 대명사이다. ‘생명을 살리는 물’ 이라는 뜻의 활명수(活命水)는 11가지 순수생약성분으로 제조하여, 과식, 소화불량, 식체 등에 탁월한 효능을 발휘하면서 4세대에 걸쳐 우리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국민브랜드이다.

109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활명수가 대중적인 브랜드가 되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과 에피소드들이 있었다. 국민들이 잘 알지 못하는 활명수 109年史의 다양한 뒷이야기들을 살펴 보도록 하겠다.


▶ 활명수가 원래 궁중에서 쓰이던 약이었다?

활 명수는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던 1897년 당시 궁중에서 사용되던 생약비방에 양약의 장점을 취해 국민에게 널리 보급하고자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신약이다. 활명수 개발자이자 동화약품 창업주의 아버지인 민병호 선생은 선전관으로서 궁중에서 사용되는 여러가지 비방을 익히 알 수 있을 만큼 한약 지식에 능통했다. 선전관이란 오늘날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장 겸 경호실장이다. 그는 이러한 궁중비방을 일반 백성이 다리지 않고 복용할 수 있도록 양약의 장점을 취하여 혼합처방을 완성하였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대한민국 최초의 신약인 활명수이다.

활명수 이전에는 급체, 소화불량이 흔한 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약이 없었을 뿐더러 민간요법에 의지하거나 약이라고는 달여서 먹는 탕약밖에 몰랐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소화불량에 효과가 있으면서도 복용이 간편한 활명수는 ‘생명을 살리는 물(活命水)’로서 민간에 널리 알려졌다.

1897년 민병호 선생의 아들 민강씨가 동화약방을 세웠다. 현재 동화약품의 모체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제약회사이다. 동화약방을 통해 대량생산체제를 갖추게 됐고 활명수가 대중화될 수 있었다.


▶ 왜 하필 소화제였을까?

수 많은 약 중에 유독 소화제인 활명수를 처음으로 만든 까닭은 당시 가장 흔한 질병이 위장장애, 소화불량이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여행가 비숍은 한국인이 못 먹는 것이 없을 정도로 잡식가라고 묘사한 적이 있다. 그것이 위장병의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성지역에서 의료활동을 하던 선교의사 에비슨(O.R. Avison)은 한국인이 많은 양의 식사를 매우 빨리 먹기 때문에 위장병이 많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평양지방의 선교의사 웰즈(J.H. Wells)도 이와 대동소이한 의학보고를 하고 있다. 이처럼 흔한 질환에 활명수는 신통한 효력을 나타내었다. 무엇보다 그 신속한 효력은 사람들을 감탄케 했다.


▶ 109년 전 활명수, 지금과 어떻게 달랐을까?

“먼 저 큼직한 가마솥에 위장약계통 각종 한약건재를 넣은 다음 물을 붓고 한참 달이면 생약의 약물이 우러나와 진한 팅크로 변한다. 이것이 복방방향팅크(複方芳香丁幾) 추출, 다음은 이 팅크를 솜을 놓은 고운체로 걸러내는 여과과정, 그리고 곱게 빻아낸 수입약재 아선약(阿仙藥)과 정향(丁香)가루를 타고 멘톨(박하)을 묘미있게 배합한다.”

당시 활명수 비방(秘方)의 내용 중 일부이다. 지금과 비교하면 원시적인 제조형태이지만, 당시 집에서 다려먹는 탕약밖에 몰랐던 시대상에 비추어 보면 양약의 제조방법을 적용해 탕약의 과학화를 시도한 획기적인 제조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활명수는 한국인의 식습관 및 체질변화에 따라 많은 변화를 해왔다. 초창기 가내수공업적인 생산체제에서 생산되던 활명수는 이제 전자동 액제생산라인에서 연간 1억병 생산, 연매출 350억원, 시장점유율 60%(2005년 기준)를 점하는 빅브랜드이다. 아선약, 계피, 정향, 현호색, 육두구, 건강, 창출, 진피, 후박, 고추틴크, 엘멘톨의 11가지 순수생약성분으로 제조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지만 배합면에서 변화가 있었다.

1966년 기존 활명수의 약효에다 탄산가스를 첨가해 청량감을 보강한 ‘까스활명수’를 발매한데 이어 1989년 ‘까스활명수-큐’를 발매하여 활명수의 브랜드 확장을 추진, 국내 소화제 시장에서 활명수의 위치를 더욱 굳건히 하였다.

하 지만 아무리 한국인의 체질이 변하고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은 한 가지이다. 다름아닌 변함없는 약효이다. 109년간 No.1 브랜드로서의 위치를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은 브랜드를 지키기 위한 노력과 마케팅 전략이 있었지만 약효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1910년대 60ml 활명수 1병 값은 50전으로 설렁탕 두 그릇에 막걸리 한 말을 먹을 수 있는 수준의 비싼 가격이었다. 현재 가격은 500원으로 대중화되고 보편화되었지만, 1910년대에는 활명수가 상당히 귀한 제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부채표 활명수가 기네스북에?

동 화약품은 1996년 한국기네스협회로부터 국내 최고의 제조회사 및 제약회사 등 4개 부문에 걸쳐 기록을 인정하는 인증서를 받았다. 특히, 활명수는 1910년 12월 16일 특허국에 등록(등록번호 제43895호)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등록상품이기도 하다. 또한 1910년 8월 15일 특허국에 등록된 부채표(등록번호 514)도 최고의 등록상표가 되었다.

동화약품은 1897년 9월 25일 창립한 이래 동일장소(중구 순화동 5번지)에서 동일상호(同和), 동일제품(活命水)을 유지함으로써 최고(最古)의 제조회사 및 최고(最古)의 제약회사가 되었으며, 활명수도 국내 최장수 의약품으로 기록됐다.


▶ (에피소드)활명수 109년사에 이런 일도 있었다.

★ “활명수와 독립운동”

일 제시대 활명수가 독립자금으로 쓰였다. 동화는 일제 치하에서 국가의 독립을 위해 비밀리에 서울 연통부(聯通府)를 현 동화약품 순화동 본사에 설치하고 활명수를 판매한 금액으로 독립자금을 조달해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서울 연통부는 1919년 7월에 상해 김구 선생의 임시정부가 비밀연락행정을 위한 첫 조치로서 국내와 국외를 연결하는 기관으로 서울 동화약품 본사에 설치한 비밀 행정기관이었다.

동화는 이와 같은 연통부 활동으로 일제 하에 회사의 존폐위기까지 겪었다. 그리고 이런 사실조차도 그 동안 동화 창립 구성원들의 지계 가족을 통해 비밀리에 구전으로만 전해 내려오다가 뒤늦게 문헌 자료 등의 고증을 통해 사실로 밝혀져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을 맞아 서울특별시에서 현 본사 부지에 ‘연통부 기념비’를 설치하고 독립운동을 한 뿌리 깊은 기업임을 널리 알리고 있다.

★ “유사품과의 전쟁”

활 명수는 그 오랜 역사만큼 유사 제품도 많이 등장했고, 그에 따라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였다. 1910년대에도 활명회생수(活命回生水), 활명액(活命液), 생명수(生命水) 등 60여종의 유사 제품이 난립했으며, 1990년대까지도 활명수의 유명세를 등에 업고 유사품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활명수의 역사는 유사품과의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1990년대부터 ‘부채표 캠페인’으로 브랜드차별화에 나서며 소비자들의 신뢰를 강화함과 동시에 소화제의 대표브랜드로서의 입지를 더욱 확고히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닙니다 라는 광고 카피다. 제품 이름은 비슷하게 할 수 있어도 동화약품의 고유 브랜드인 부채표 상표만큼은 따라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결과는 대성공. 국내광고역사에도 성공캠페인으로 불리는 ‘부채표 캠페인’을 10년 넘게 진행해 오면서 소비자들의 인식속에 활명수=부채표=오리지널이라는 공식이 자리잡혀 ‘소화제의 대명사’로 이제는 확고한 자리를 굳혔다.

★ “활명수 칵테일”

소 주 업계의 판매 경쟁이 치열하던 1960년대 진로소주 영업판촉팀이 판촉활동의 일환으로 술집을 돌아다니며 진로소주에 활명수를 타서 마시는 시범을 보였다. 소주의 쓴 맛을 없애주고 소주의 색깔을 노르스름하게 해 마치 양주를 마시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활명수 칵테일’이라 불리는 이 제조방식(?)은 입소문을 타고 퍼져 당시 주당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한 편, 9월 25일 109돌을 맞이한 활명수와 함께 동화약품도 109주년을 맞아 창립기념식을 거행했다. 안양공장 대강당에서 동화약품 임직원 및 가족회사 사장단을 초청해 거행된 이번 행사는 2007년 동화약품의 110주년을 1년 앞둔 시점에서 일류 제약회사로 발돋움하기 위한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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